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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후원, 물길이 그린 정원의 시간

굽은 물길은 아름다운 선이면서 빗물을 다루는 시설이었습니다. 왕궁리 후원의 환수구와 곡수로를 따라, 경관과 토목 기술이 만나는 지점을 읽습니다.

글 컬처스탭 · 자료 확인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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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순서 6개의 단락
01

건물 사이가 아니라 구릉부터 보기

궁궐을 떠올릴 때 시선은 큰 전각의 지붕으로 향합니다. 왕궁리의 조사 자료는 그 뒤편 구릉에도 눈을 돌리게 합니다. 국가유산 지식이음의 발굴 개요에는 조경석으로 꾸민 정원과 물길들이 얽힌 후원이 서로 구별되어 등장합니다. 같은 궁성 안의 녹지처럼 보여도 조사 구역과 남은 시설의 성격은 다릅니다. 먼저 배치도에서 중심 건물, 정원, 뒤편의 높은 땅을 따로 찾아보세요. 평면도에 그어진 선을 물이 흐를 높낮이와 함께 생각하면, 비어 보이는 공간이 건물을 받쳐 주는 또 하나의 구조로 바뀝니다. 궁궐의 윤곽을 담장만으로 그렸을 때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순간입니다.

참고 자료 [1]

02

구릉을 감싸는 긴 수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표한 2013년 조사 성과에서 후원은 약 3만 9,100제곱미터로 소개됩니다. 구릉의 위쪽 능선을 따라 감싸는 환수구, 돌을 다듬어 놓은 석렬, 정상부의 건물터가 함께 확인됐습니다. 환수구라는 이름은 물을 둘러 돌리는 시설의 형태에 주목하게 하지만, 발표문이 설명하는 기능은 장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궁성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도 있었습니다. 경사면에 떨어진 빗물이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조건을 건축의 일부로 다룬 것입니다. 배치도의 물길을 바깥으로 따라가 보면, 정원이 궁성 전체의 땅을 유지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2]

03

돌과 물을 함께 놓은 까닭

같은 발표는 모양이 독특한 돌들을 배치하고 물을 이용해 경관을 구성한 흔적을 설명합니다. 물을 빨리 빼는 목적만 있었다면 돌의 형태와 배치가 왜 중요했을까요. 이 질문은 후원의 물길을 바라보는 시설과 작동하는 시설로 동시에 읽게 합니다. 흐르는 물은 이동 경로를 갖고, 그 곁의 돌은 시선을 멈추게 합니다. 두 가지가 결합하면 배수시설의 선은 풍경의 선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를 곧바로 특정한 연회나 의식의 장면으로 바꾸기보다, 조사에서 확인한 돌과 수로의 관계에 집중해 보세요. 물길의 굽이, 돌이 놓인 자리, 경사면의 방향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설계자가 다룬 문제의 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2]

04

굽은 물길이 모두 같은 나이는 아니다

후원에서 확인된 곡수로를 백제 궁궐의 연회용 시설이라고 한 번에 설명하면 시간의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후원 구성의 변천을 연구한 최문정의 논문은 환수구 안에 퇴적이 진행된 뒤 서쪽 경사면에 곡수로가 새로 조성되고, 방형 초석 건물도 들어선 것으로 해석합니다. 물을 처리할 필요는 이어졌지만 그 일을 맡은 시설은 바뀌었다는 설명입니다. 물길의 곡선이 닮았다는 이유로 조성 시기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면에서 서로 이어지는 부분과 겹쳐지는 부분을 다르게 표시하면, 한 장의 배치도 속에 여러 차례의 공사가 포개져 있다는 사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3]

05

궁궐이 사라진 뒤에도 흐른 물

후원 변천 연구는 궁성과 관련해 조성된 환수구가 백제에서 통일신라에 걸쳐 사용되었고, 이후 새 수로와 건물터가 들어선 과정을 설명합니다. 나말여초, 곧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재정비 가능성도 논의합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 왕궁리의 역사를 궁궐 다음 사찰이라는 두 칸만으로 나누기 어려워집니다. 건물의 용도가 달라져도 비는 내리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새로 들어온 공간 역시 이전 시설을 이어 쓰거나 고쳐야 했을 것입니다. 이는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현한 설명이 아니라, 조사에서 확인한 시설의 지속과 교체를 공간의 조건에 비추어 읽는 방법입니다.

참고 자료 [3]

06

정원은 완성된 그림보다 긴 과정

왕궁리 조사 현황표에는 여러 해에 걸쳐 정원과 후원, 궁장과 수구를 조사한 기록이 나뉘어 있습니다. 한 번의 발견으로 궁궐의 물길 전체가 완성된 그림처럼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서로 떨어진 구역의 결과가 쌓이며 시설 사이 관계를 묻게 된 것입니다. 자료를 읽을 때도 먼저 물이 모이는 곳과 나가는 곳을 표시하고, 다음에는 그 사이의 돌과 건물터를 보세요. 마지막으로 시설 이름 옆에 조성 시기와 사용 시기를 따로 적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첫인상은 이렇게 물을 다룬 기술, 공간을 고친 시간, 그 관계를 찾아온 조사 과정으로 깊어집니다. 곡선을 감상하던 눈이 그 곡선이 생긴 까닭을 읽는 눈으로 옮겨갑니다.

참고 자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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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원문과 연구자료

  1.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국가유산 지식이음 — 왕궁리 유적 조사 소개 ↗https://portal.nrich.go.kr/kor/page.do?menuIdx=1162
  2. 문화재청·정책브리핑 — 2013년 왕궁리 후원 발굴 성과 ↗https://m.korea.kr/news/issueQAView.do?newsId=148770378
  3. 최문정, 고고광장 13 — 익산 왕궁리유적 후원 영역 구성과 변천양상, 2013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184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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